|
벨린조나는 멜리데에서 다시 루가노를 거쳐 한참을 가서 도착했다. 여행객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 보였다.
아무래도 대도시나 고급 휴양도시 보다 지명도가 떨어져서 인지 동양인 여행객은 우리 가족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날씨는 강한 햇빛이 내리쬐며 뜨거웠다. 역에서 내려 나오다 보니 건너편에 신발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본희가 마이엔펠트에서 하이킹을 하며 샌들이 높아 물집이 생기는 등 너무 고생을 한 터라 편한 신발로 바꾸는
게 시급했다. 조금 촌스럽고 비싸기는 했지만 낮고 편한 샌들로 신발을 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몇 가지 정보를 얻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도심지에서 고개만 들면 바로 보이는 성인데도 걸어서 가면 50분이나
걸린다고 한다. |
|
버스를 타니 겨우 5분만에 성의 입구에 도착을 했다. 우리가 간 곳은 UN 세계 문화 유산인 카스텔그랑데가
아니라 시가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카스텔로 디 몬테벨로로 카스텔그랑데를 가장 잘 볼 수 있다고 안내소에서
권유를 해서 찾은 곳이다정작 카스텔그랑데를 가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의 아름다움은
정말 대단했다. 오래된 느낌이 가득 배어있는 돌로 쌓아 올려진 성채에 아주 고운 잔디로 주변이 가꾸어진 절묘한
조화의 예술품이었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외벽과 본성 사이에도 넓은 잔디가 곱게 가꾸어져 있었다. 벨린조나에
있는 3개의 성 중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있기 때문에 망루에 올라가 보니 카스텔그랑데의 신비스러움이 한눈에
드러났다. 기암절벽 위에 아름답게 서있는 성의 모습이 환상 그 자체였다. 벨린조나 전체의 모습을 조망하고 잔디밭에서
민호와 신나게 뛰어 놀면서 사진을 찍었다. . |
 |
|
민호는 레고 시리즈에 나오는 흑기사의 성이라며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놀았다. 관람객이 우리 식구 뿐이라 성 전체를 빌려서
노는 듯 했다.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걸어서 내려오기로 하고 길가의 집들과 사는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역으로 향했다.
20여분을 걸어서 역에 도착했다. 내려오면서 보니 집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작은 하수로 하나까지도 아주 깨끗한 게 역시
스위스인들 다웠다. 하루종일 야외에서 걷고 구경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나마 편하게 여행한 하루였다. 그리고 스위스
여행자들이 보기 힘든 벨린조나라는 곳을 찾아서 색다른 여행을 한 뜻 깊은 하루기도 했다.
|
■ 7월
20일 (토) 다섯째날 (루가노 → 체르맛)
우리나라에서도 너무너무 유명한 마터호른이 잇는 체르맛을 향하는 날이다. 이태리 풍의 여름을 이틀간 즐기고 다시 스위스
본연의 청정 자연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일찍 아침을 먹고 기차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민호가 누군가를 보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녀석이 언제 본 사람들이라고 또 장난을 치나 싶어 돌아보니 티라노에서 루가노를 오면서 민호와
함께 버스에서 장난을 치던 미국인 식구가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유일하게 여행 와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보니 반가웠다.
불행히 인터라켄을 향하는 길이라 동행은 하지 못하고 열차가 올 때까지 몇 마디 나누고 헤어졌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스와치만큼
정확한 스위스 열차가 14분이나 늦게 도착을 했다. 지금 늦은 건 문제가 없지만 다음 역에서 갈아탈 열차를 7분 정도
사이를 두고 예약을 했는데 혹시 놓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오늘 타는 빙하특급은 좌석이 예약제로 운영되는 기차라 다음
차를 타면 어떻게 되는 건지 몰라 내심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 교환 역인 괴세넨에서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뛰어서
간신히 안데르마트행 등산열차에 올랐다. 경사가 심한 고지대를 선로에 톱니바퀴를 달아서 가는 열차인데 겨우 10여분 만에
도착을 했다. 물론 안데르마트에서도 여전히 달리기를 해서 힘들게 마지막 열차에 올랐다. 의자에 앉자 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는 체르맛까지 그냥 가면 되기 때문에 긴장이 풀리면서 졸립기 까지 했다. 민호와 본희는 급하게 뛰는데 지쳤는지
모두 잠이 들어버렸다. 지금부터 그 유명한 빙하 특급인데 깨워서 보라고 하고 싶지만 여행은 몸이 편안해야 즐거운 법이라
그냥 조금 더 편하게 재우기로 했다.
빙하특급은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특급 열차였다. 베르니나 특급에서 실망한 기분이 싹 사라져 버렸다. 푸른 초원과
몇 채 안 되는 그림 같은 집들, 멀리 보이는 장엄한 만년설, 그리고 그 앞을 날고 있는 패러글라이딩까지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였다. 우리나라에 있으면 전국 제1의 명소로 꼽힐만한 폭포가 여기저기 흘러 내리며 시원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 스위스 여행을 한다면 빙하특급은 꼭 타라고 권유하고 싶은 정도였다.
|
오후 2시반 정도에 체르맛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하자 마자 역 광장에 있는 마차가
눈에 띄었다. 호텔의 셔틀 버스가 전기자동차 내지는 마차였다. 작은 산악 도시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너무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동양인도 많이들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물론 한국인은 한명도 보지 못하고 전부 일본인들 천지였다.
아마도 일본에서 요새 많이 다녀가는 유명한 도시인 모양이다. 일부 호텔은 일장기까지 걸고 영업을 할 정도였다.
시가지에서 마터호른이 바로 보이고 거리는 목조 건물로 이루어졌지만 각 건물마다 로렉스나 불가리, 오메가 같은
명품들이 가득한 상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여정을 풀고 고르너그라트에 오르기로 했다. 호텔도
지금까지 묶은 곳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

|
|
|
원목으로 이루어진 가구나 벽은 물론이지만 창문으로 바로 보이는 마터호른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물론
체크인하면서 부탁을 하긴 했지만..) 대충 정리를 하고 고르너그라트 역으로 향했다. 일반 철도 역과는 달리
사설철도이기 때문에 스위스패스를 가지고 무료로 탈수는 없고 50% 할인을 받았다. 그래도 1인당 33프랑(2만6천원)을
내야만 했다. 고르너그라트에 오르며 내려보는 광경은 빙하특급에 이어 또 한번 경탄을 자아냈다. 넓은 초원을
하이킹하는 사람들, 산 중턱으로 흐르는 구름, 초원에 피어있는 들꽃들까지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이 없어 보였다. 열차가 작은 역 몇 개를 거치면서 고르너그라트에 도착했다. 고르너그라트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전망대 중의 하나로 스위스에서 등산열차로 올라갈 수 있는 전망대 중 두 번째로 높은 곳이다. |
|
차가운 바람이 심하게 불었지만 햇살은 따가워서 자외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민호는 돌맹이를 절벽 아래로 던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난 주변의 봉우리들을 감상하며 경외감에 사로 잡혔다. 역 주변에서 조금 놀다가 전망대로 걸어갔다. 전망대에는 천문
관측소와 호텔, 레스토랑이 있었다. 올라가는 도중에 절벽에서 산양 2마리가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더니 곤충, 동물에 관심이
많은 민호가 놓치지 않고 좋아라 소리를 질렀다. 한참동안을 멈추어서 민호의 관찰대상을 함께 봐주어야만 했다. 정상에서
주변의 웅장한 파노라마를 보고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역 안으로 들어와 보니 벽이 온통 낙서 투성이였다.
물론 한국 여행객들의 자랑스러운 글씨도 조금 눈에 띄었다. 나도 무언가 남기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느꼈지만 민호도 있고
해서 꾹 참았다. 다시 체르맛 시내로 돌아와 호텔에서 잠시 쉬었다가 본격적인 시내 구경 및 저녁 식사를 위해 나섰다.
시내 레스토랑을 기웃거리다가 그냥 만만해 보이는 호텔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이 많아서 그런지 여전히 일본말로
인사를 하길래 다시 한국인이라고 하고 주문을 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종업원의 표정이 티라노 종업원처럼
묘한 것이 아닌가? 나중에 물어보니 이 친구도 이태리 인이라는 게 아닌가. 무슨 이태리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월드컵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
|
민호에게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하니 종업원을 앞에 두고 신나게 ‘오! 필승 코리아!’를 불러댔다. 역시 자랑스러운
내 아들 한국인 송민호였다. 그래도 티라노 종업원보다는 훨씬 양순하고 매너도 있었다. 비싸기는 하지만 퐁듀를
시켜서 고기와 포테이토를 신나게 먹었다. 100프랑이 넘기는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고기도 맛있고 도시도 마음에
들고 저녁 거리는 그냥 눌러 살고 싶었으니까…. 메뉴를 기다리는 동안 민호에게 색칠놀이 세트도 가져다 주면서
고객들의 지루함을 달래려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물론 민호도 자기 주특기를 신나게 살리면서 고기도 먹고
그림도 그리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체르맛은 정말정말 다시 가보고 싶은 작은 도시 (아니 마을이라는
표현이 맞겠다)였다. |
|
■ 7월
20일 (토) 다섯째날 (루가노 → 체르맛)
아침에 눈을 뜨니 날씨가 영 심상치가 않다. 스위스는 매번 이렇게 기후가 종잡을 수 없으니
여행하기가 정말 곤란하다. 물론 이런 여행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부지런히 준비를 한다고 서둘렀는데 기차 시간이 다
되어서 비가 오는 와중에 또 뛰었다. 우산을 들고 힘들게 쫓아오는 민호가 너무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기차역을 향해
달렸다. 예정된 8시50분 출발 기차에 막 타려고 하는데 역무원이 앞을 막았다. 이 기차는 모두 1등 석이라 다른 플랫폼에
있는 기차를 타라고 안내했다. 안내하는 열차를 탔는데 이 열차는 9시 10분에 출발을 한다고 한다. 아니 그럼 뭐하러
이렇게 힘들게 뛰었을까 하는 한숨이 나온다. 민호와 본희는 힘이 들어서 가쁜 숨을 몰아 쉬는데 전부 내 잘못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 한숨을 돌리고 여유롭게 주변을 감상하며 브리그로 향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알프스도 나름대로 무척 운치가
있었다. 기차 내부도 한국의 기차처럼 습기차고 짜증나는 게 아니라 편안하고 상쾌했다. 비에 젖은 초원과 기암괴석, 폭포,
창틀에 꽃이 가득한 집들을 보면서 시간 가는줄 모르게 브리그에 도착했다. 그런데 브리그 역에서 조금 남는 시간 동안 전화도
하고 민호에게 자판기에서 쵸콜릿 등을 사주면서 고민이 생겼다. 오늘은 발렌베르그 야외 박물관에 가기로 일정을 잡았는데
비가 오기 때문에 다른 일정을 잡아야 했다.일단은 먼저 슈피츠 행 열차에 올랐다. 조금 더 날씨를 보고 결정을 하기로
했지만 비는 계속 오고 해서 슈피츠를 지나 튠까지 기차 여행을 즐겼다. 여행 책자를 보니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람선
코스가 튠 호수 유람선 코스라고 나오고 있어서 배를 타고 인터라켄으로 향하기로 했다. 튠에서 내려 민호와 본희는 역에서
쉬게 하고 가까운 선착장에서 시간과 배를 확인하고 역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 있어서 역 구내에 있는
KIOSK에서 빵을 사서 간단히 요기를 때우고 있는데, 갑자기 ‘저 말씀 좀 여쭐께요’라는 한국말이 들려왔다. 스위스
와서 처음 듣는 한국말이라 놀라 돌아보니 젊은 학생 한명이 새카맣게 탄 얼굴로 안내센터 위치를 물었다. 하필 안내센터가
쉬는 날이라 안내를 해주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오랜 시간동안 여행을 했는지 행색은 초라했지만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도 젊었을 때 저런 여행을 한번 해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민호에게도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
비도 어느 정도 그치고 배에 올랐다.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매우 날렵하고 늘씬한 모양이 썩 마음에 들었다.
배의 1층은 일반 승선 객들이 머무는 곳이고 2층에 테이블들이 놓여 있는 곳은 모두 식당이었다. 인터라켄에
가까워서 그런지 한국인도 많이 보였고, 1층은 복잡하고 쉴 곳이 마땅치 않아서 2층 식당에 자리를 잡고 빵으로
때운 요기를 제대로 다시 하기로 했다. 핫쵸코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소고기 뭐라고 적혀 있는 요리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는 어린 학생이 영어 조금 할 줄 알아서 권하는 음식을 주문했다.유람선이 출발하고 튠 호수는 우리에게
경탄을 이끌어 냈다. 왜 여행 가이드북마다 여기 유람선이 스위스 최고의 코스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거기다 입이 짧은 민호가 주문한 고기와 상추를 얼마나 잘 먹는지 너무 기분이 좋았다. |

|
|
튠호수 유람선은 호수에 인접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교통 수단이었다.
들르는 마을 하나 하나가 전부 그림 같은 풍경이고 호수를 둘러싼 산들은 누군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만들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식사를 하고 민호랑 같이 화장실에 간 본희가 혼자 올라왔다. 놀라서 물어보니 민호는 지하에 있는 놀이방에서 논다는 것이다.
내심 걱정이 되어서 잠시 주변을 보다가 놀이방으로 내려 갔다. 역시 민호답게 국적, 연령, 언어 다 무시하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블록에 그림 그리기, 자동차 등 매우 잘 구성된 놀이방이었다. 관광 대국다운 면모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환상의 유람선 여행을 마치고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비도 그치고 날씨도 맑게 변해 있었다.
|
인터라켄 웨스트 역을 나온 순간 체르맛의 아늑함과 아름다운 풍경은 온데 간데 없고
번잡한 도시적 감각의 상점들이 즐비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지도를 보고 예약을 해 놓은 샬레 오버란트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데 호텔에 우리 회사의 브랜드인 TTL 깃발이 걸려 있었다.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TTL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글로벌 게스트하우스의 인터라켄 호텔이 샬레 오버란트였다. 아무튼 체크인을
하고 거리에 나왔다. 놀랍게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온통 한국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차 있었다. 식당의 호객 행위도
한국말로 하고 있고 메뉴도 한국말로 써있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더 낮선 느낌을 받은 것은 아마도 지나친 상업
주의에서 오는 실망감 때문이었던 같다. |
|
|
호텔 내부도 체르맛에서 경험한 원목의 아늑함 대신 도시의 세련된 분위기가 느껴지는 타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시내를
거닐며 COOP에서 과자와 먹을 것도 좀 사고 융프라우요흐 여행을 대비해 민호와 본희의 신발도 구입을 했다. 어두워지는
거리를 거닐며 상점의 물건들도 구경을 하고 오스트 역까지 다녀 왔다. 루가노, 체르맛에 이어 세번째 새로운 스위스를 경험하는
날이었다. |